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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비의 시간 죽이기
⌜도자기 무덤⌟ 여기 솜씨 좋은 도예가(陶藝家)가 있다. 이 도예가는 자신의 평생을 도예 그 자체에 바쳤다. 어려서부터 도예라는 것은 자신을 사로잡는 무언가 였다. 첫째로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그리고 둘째로 남들 역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위해 깨고 또 깼다. 자신의 작품들을 수없이 깨왔고, 자기 자신도, 자신의 작품들만큼이나 깨왔다. 부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만들기 위하여. 그 도예가의 집 뒤편에는 고요하고 장엄한 도자기 무덤이(아니 그것은 어쩌면 도예가의 역사였는가?) 있었다. 다행히도 깨져버린 도자기들은 그 도예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폐허위에 빛나는 작품이 태어난 것이다. 도예가가 만족할 만한 그 도자기는 날렵한듯하지만 원만한 곡선을 가졌고, 어느 날은 무거워 보였지만 또 어느 날은 ..
⌜그릇⌟ 여기 선비가 한 명 있다. 이 선비는 아주 고결한 정신을 가졌다. 늦잠을 자는 일도 없었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없었고, 공부를 하지 않는 날 역시 없었다. 사람들은 그 선비를 바라보며 자신을 다듬었고, 그 사람을 높게 샀다. 그리고 말했다. "여보게들! 여기 이 완벽한 선비의 영원한 상을 바라보시오! 이것 참 훌륭하지 않소?" 하지만 이 선비에게는 말 못할 슬픔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끝 없는 허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긴놈은 왜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도 자신을 다스렸는가? 그렇게도 많은 물을 부었는데도 도대체 이 독에는 물이 채워지지를 않는가? 그렇다고 그 독이 밑이 빠진 독도 아니었다. 이것이 선..
⌜도룡(屠龍)⌟ 옛날엔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걸 보고, 용 잡는 기술을 배운다고 했지. 무찌를 도(屠)에 용 용(龍) 도룡(屠龍). 커다란 뱀에 날개가 있고, 그것이 하늘을 날지. 용을 잡겠다고? 용 잡는 기술을 배워서 어디다 쓰나? 보이지도 않는 걸 잡겠다고 일생을 걸어? 허허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우리가 파리를 보고, 파리채를 들어서 "잡았다!" 하면서 파리를 내려치면, 파리는 그곳에 있지. 그런데 이 미(美)라는 놈은 말이야, "잡았다!" 하면서 내려치면 내가 봤던 미(美)는 온데간데 없고 다른 곳에 떠억 하니 앉아서 날 비웃고 있단 말이지. 이게 예술가의 업(業)이야.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서 떠돌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새롭다고 생각한 것들은 그저 지나온 길에 불과해...
계급(階級)영 class, 독 Klasse 계급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사회적인 의미가 강하다. 계급이란, 우선 같은 사회적 조건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의미한다. 사회적계급은 18세기와 19세기 언저리에서 경제학적 맥락으로 나온 개념이다. 계급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철학자 마르크스와 마주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사회에는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며, 이는 '지배계급' 과 '피지배계급' 이고, 이 둘 사이에서 갈등관계가 존재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계급 개념은 사회와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알고 있을 텐데,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승려), 다음 계급인, 크샤트리아(군인), 다음 계급인, 바이샤(상인), 다음 계급인 수드라..
⌜비윤리적 섹스⌟ 섹스란 무엇인가? 섹스는 그저 성기끼리의 접촉, 삽입, 마찰의 과정을 통해 오르가즘이라는 결과 값에 도달하는 기계적 움직임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인가? 아마 이 대답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물음에의 찬성은, 곧 자신에 대한 기계로의 환원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 창조의 숭고한 행위, 사랑이라는 감정의 교감 따위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섹스를 기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에 대해, 오직 쾌락만을 위한 섹스보다도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섹스라는 행위는 사랑만큼이나 복잡한 무언가가 있음을 누구나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섹스는 정말이지 기계적이지 않다. 하지만 기계적인 섹스에 대한 거부 못지않게, 쾌락만을 위한 섹스 역시 거부시 된다. 당연한 물음일지도 모..
검증(檢證)영 verification, 독 Verifikation/Überprüfung 검증은 어려운 말은 아니다. 아주 일상적인 단어이기도 하고, 증명이라는 말과도 유사하게 사용된다. 약간 엄밀하게 말을 하면, 과학에서 이 검증이란, 증명이자 연산과정이다. 우리는 철학(특히 과학철학분야)에서 검증에 관해서 논할 때, 철학자 포퍼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포퍼의 철학적 화두는 "과학적인 것이 무언인가?" 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론은 과학적인 이론이어서 신뢰할만 하다고 떠들어대는데, 이런 이론들 사이에서 진짜 과학적인 이론을 따져보는 것이 포퍼의 작업이었다. 즉, 사이비과학에서 진짜 과학을 선별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선별할 것인가? 포퍼는 한 가지를 말한다. '반증가능성'이다. 언..
개인주의(個人主義)영 individualism, 독 Individulismus 개인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개인을 우선시하는 철학적인 입장이다. 사회라는 것은 개인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고, 즉 개인들을 위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주의라는 개념은 사실상 근대에 이르러서 확립되었다. 정치철학의 발전과 함께, 근대적인 의미의 시민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곧 개인과 이어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사회가 우선시되었다. 그들은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며, 폴리스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개인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의 한 부분이다.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개인은 쓸모 없게 된다. 그것은 몸에서 분리된 팔과 다리가..
감성(感性)영 sensibility, 독 Sinnlichkeit 감성이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많이 쓰여지는 말이다. "감성터진다.", "애플감성 지렸습니다.", "왜이리 감성적이야?" 보통 이런식으로 사용이 되는데, 일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철학적으로 엄밀히 사용되면, 그 의미가 꽤 달라진다. 사실 의미가 달라진다기 보다는 원래의 자기 뜻으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한자만 보아도, 느낄 감(感)에 성품 성(性)을 사용하는데 그대로 풀이하면, 인식주체(나)가 어떤 것과 감응하여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다. 철학에서는 이 의미 그대로 사용된다. 이 감성이라는 말은, 주로 인식론분야에서 사용되고, 철학자 칸트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이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
감각작용(感覺作用)영 sensation, 독 Empfindung 감각은 나(인식주체)와 어떤 대상이 '물리적'으로 접촉할 때 생긴다. 어려운 말은 아니다. 우리가 주전자를 보고 만지면, 주전자를 봤다는 것, 만졌을 때의 촉감, 차갑다, 뜨겁다 등을 감각한다. 이 감각이라는 것은 우리의 외부에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순간적인 인상만을 줄 뿐이다. 아직 그 어떤 사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기 전에는, 우리가 감각한 것들은 그저 정리되지 않은 정보들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사과를 보면, 사과인 것을 안다. 우리가 그것을 사과라고 생각하는 것 부터가 이미 우리는 머릿속에 사과라는 인식이 잡혀있는 것이다. ..
가능성(可能性)영 possibility, 독 Möglichkeit 가능성이라는 것은, 실존이나 현존과는 다르다. 가능한 것은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능한 것은 앞으로 현존할 수도 있다. 이는 필연과도 구분이 된다. 필연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인과관계같은 것으로, 무조건 일어날 일을 뜻한다. 하지만 가능한 것은,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작은 씨앗은 꽃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 무조건 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존과 현존도 짧게 이야기를 해보면, 이도 약간 다르다. 거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는 지금 집에 있다. 이 때, 회사에 가신 아버지는 실존한다. 하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면, 아버지는 실존하며, 내 앞에 현존한다. 가능태/잠재력(可能態/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