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철학적 사유다발 (20)
오선비의 시간 죽이기
⌜도자기 무덤⌟ 여기 솜씨 좋은 도예가(陶藝家)가 있다. 이 도예가는 자신의 평생을 도예 그 자체에 바쳤다. 어려서부터 도예라는 것은 자신을 사로잡는 무언가 였다. 첫째로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그리고 둘째로 남들 역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위해 깨고 또 깼다. 자신의 작품들을 수없이 깨왔고, 자기 자신도, 자신의 작품들만큼이나 깨왔다. 부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만들기 위하여. 그 도예가의 집 뒤편에는 고요하고 장엄한 도자기 무덤이(아니 그것은 어쩌면 도예가의 역사였는가?) 있었다. 다행히도 깨져버린 도자기들은 그 도예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폐허위에 빛나는 작품이 태어난 것이다. 도예가가 만족할 만한 그 도자기는 날렵한듯하지만 원만한 곡선을 가졌고, 어느 날은 무거워 보였지만 또 어느 날은 ..
⌜그릇⌟ 여기 선비가 한 명 있다. 이 선비는 아주 고결한 정신을 가졌다. 늦잠을 자는 일도 없었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없었고, 공부를 하지 않는 날 역시 없었다. 사람들은 그 선비를 바라보며 자신을 다듬었고, 그 사람을 높게 샀다. 그리고 말했다. "여보게들! 여기 이 완벽한 선비의 영원한 상을 바라보시오! 이것 참 훌륭하지 않소?" 하지만 이 선비에게는 말 못할 슬픔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끝 없는 허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긴놈은 왜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도 자신을 다스렸는가? 그렇게도 많은 물을 부었는데도 도대체 이 독에는 물이 채워지지를 않는가? 그렇다고 그 독이 밑이 빠진 독도 아니었다. 이것이 선..
⌜도룡(屠龍)⌟ 옛날엔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걸 보고, 용 잡는 기술을 배운다고 했지. 무찌를 도(屠)에 용 용(龍) 도룡(屠龍). 커다란 뱀에 날개가 있고, 그것이 하늘을 날지. 용을 잡겠다고? 용 잡는 기술을 배워서 어디다 쓰나? 보이지도 않는 걸 잡겠다고 일생을 걸어? 허허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우리가 파리를 보고, 파리채를 들어서 "잡았다!" 하면서 파리를 내려치면, 파리는 그곳에 있지. 그런데 이 미(美)라는 놈은 말이야, "잡았다!" 하면서 내려치면 내가 봤던 미(美)는 온데간데 없고 다른 곳에 떠억 하니 앉아서 날 비웃고 있단 말이지. 이게 예술가의 업(業)이야.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서 떠돌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새롭다고 생각한 것들은 그저 지나온 길에 불과해...
⌜비윤리적 섹스⌟ 섹스란 무엇인가? 섹스는 그저 성기끼리의 접촉, 삽입, 마찰의 과정을 통해 오르가즘이라는 결과 값에 도달하는 기계적 움직임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인가? 아마 이 대답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물음에의 찬성은, 곧 자신에 대한 기계로의 환원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 창조의 숭고한 행위, 사랑이라는 감정의 교감 따위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섹스를 기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에 대해, 오직 쾌락만을 위한 섹스보다도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섹스라는 행위는 사랑만큼이나 복잡한 무언가가 있음을 누구나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섹스는 정말이지 기계적이지 않다. 하지만 기계적인 섹스에 대한 거부 못지않게, 쾌락만을 위한 섹스 역시 거부시 된다. 당연한 물음일지도 모..
⌜음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노자(老子)의 사상에서 특기할 것은 여럿 있겠지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무(無)가 가진 힘이다. 노자는 단순히 '있다'를 유(有), '없다'를 무(無)라 하지 않는다. 무(無)는 유(有)의 시작점이다. "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 때문이다.)" 무(無)와 유(有)는 그 경계지점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볼까? 자 우리가 달리기시합을 하려고 출발선 상에 서있다. 출발하라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발돋움을 한다. 자, 우리는 멈추어 있다가 달린다. 즉 멈추어 있는 상태(無)에서 달리는 상태(有)가 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달리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멈추어 있는 상태와 움직이려하는 상태, 그 경계지점을 우리는 알 수 있는..
⌜물놀이⌟ 눈을 떴을 때 나는 숲이었다. 이유 모를 익숙한 숲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걷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정신이 깨었을 때, 나는 폐허가 된 고성(古城)앞 이었다. "까드득 까드득 노래를 들으러 왔는가?" 한 노파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 소리가 노파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구시오?"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소리요?" "나를 본 사람은 노래를 들어야하지" 노파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원히 수레바퀴를 굴려라! 아니, 수레바퀴를 짊어지고 기어라. 내가 어두운 물가로 데려가주마. 엄마! 아직 물놀이는 끝나지 않았어요. 끝이 없는 물놀이. 물가의 달팽이. 끝이 없는 물놀이. 짊어지고 걷는 것은 다..
⌜절대적인 황금기는 있는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 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자신이 원하던 파리의 황금시대로 돌아가 행복감에 젖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드리아나' 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길이 생각하는 황금시대는 아드리아나에게는 그저 현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아드리아나 역시 더 과거의 황금시대를 꿈꾼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아드리아나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황금시대로 여행을 하게 되고 행복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아드리아나가 생각하는 황금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 역시 현실에 불과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황금시대인 르네상스 시대를 꿈꾼다. 과연 절대적인 황금기는 존재하는가? 혹자는 말했다. "인간의 재미있는 특성중 하나는, 인간은 미래에서 부러움을 찾지 않는다." 현재의 인..
⌜줄광대⌟ 줄광대는 줄에 올랐다. 여기까지는 구경꾼들의 여러 염려 덕택으로 순탄히 올라오긴 했다만, 여기서 저기까지 건너가기가 장히 어려운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이, 바람에도 숨구멍이 있다. 그 숨구멍을 피해 건너가야 한다. 깃털과 손에 든 부채로 바람의 결을 읽어내야 한다. 처음 내딛는 발과 마지막에 내딛는 발은, 꼭 한 걸음 같아야만 한다. 줄 끝이 멀리 보여서는 더욱 안 되겠지만, 가깝고 넓어 보여도 안 되는 것이다. 줄 위에 올라서면, 줄이라는 것이 눈에서 아주 사라져버리고, 그곳만의 자유로운 세상이 있어야 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 줄 위에서는 눈이 없어야 하고, 귀가 열리지 않아야 하고, 생각이 땅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줄이 바로 알아채고서는,..
⌜망아지 그리고 인간⌟ 여기. 바로 지금 여기에 자연에서 뛰놀고, 자연에서 나는 풀을 뜯고,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자라난 아주 건강한 자연 상태의 망아지가 한 마리 있다. 이 망아지가 보는 세계란,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언덕이었고, 그렇기에 망아지의 눈 속에 비치는 언덕 역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망아지의 눈 역시 끝없는 세계였다. 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망아지를 통해 망아지의 앞으로 부는 것이었다.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 역시 망아지를 통해 망아지의 뒤로 부는 것이었다. 시원한 바람은 망아지의 털 한올한올을 적신다. 망아지가 맞는 바람은 얼마나 시원했던가! 망아지의 발아래에는 땅이 있었고, 망아지의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었다. 끝없는 생명의 기운이 망아지를 감..
⌜한 명의 승려(僧侶)가 있었다⌟ 한 곳만을 응시해야 하는 지금은 중세시대, 여기 불운하게도 한 명의 승려(僧侶)가 있었다. 그리스도적인 교의(敎義) 앞에서 불가(佛家)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을까? 사실 용납될 수 없다기 보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고행(苦行)의 일부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길에서(그곳은 시야마저도 좁았던가?) 횃불 하나 없이 걷고 있는 것, 그저 드문드문 풀이 자라지 않은 곳이 진정 사람의 길이겠거니 믿고, 서툴게 사박사박 밟아가는 것. 그것은 승려에게 정신적인 고행은 아니었다(사실 승려는 정신적인 고행을 원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교의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환희의 일부. 그래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버릴 수 없는 사명. 반면, 지금의 고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