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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다발

죽음에 대하여

오선비 2018. 3. 23. 09:27




죽음에 대하여

 

 

 나는 사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 바가 없다. 아마 나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어둠을 무서워하듯,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도, 죽음은 죽음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기에 그저 무수한 추측만이 덧 쓰여 질 뿐이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은 정확한 이유도 없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아주 큰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직접 죽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을 경험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릴 방도 역시 없다.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이들은 반드시 침묵한다. 진리를 알게 되더라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자기 미래의 끝인 죽음을 떠나, 코앞의 미래라는 것 역시 계획을 세우거나 대비하려할 뿐이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미래라는 것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등진 채 뒷걸음으로 걸어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을 생각해볼 때, 미래의 끝인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뒤를 볼 수 없는 채로,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상태로 죽음이 올 때까지 뒷걸음으로 걸어 간다는 것은 확실히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죽음은 두려워할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하나 죽음에 대하여 아는바가 없고,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것은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뒷걸음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는바가 없는 나로서도 죽음에 대해 한 가지 확실 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이야 말로 각자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행위라는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죽음은 숭고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죽음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죽음이기 때문이고 둘째,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인식함으로서만 혹은 자신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에만 자신의 삶을 '그제서야' 진정으로 채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누구도 모르고 있는,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모두 외면하고 있는 혹은 망각하고 있는, 마치 그것은 공개된 비밀 같은 것이다.

 


첫째에 대하여 - 죽음은 숭고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이후,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가치관을 침식한 이후, 그리고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측면이 더욱 강해진 요즘, 거의 대부분의 일들은 돈으로써 해결이 가능하다. ,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들까지도 남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 대신에 해줄 수 없는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자기 자신의 죽음이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숭고함 그 자체. 나의 죽음은 오직 나에게만 해당되고, 오직 나만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 대신에 태어나줄 수 없듯이 죽음역시 그러하다. 자기 자신만이 짊어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한 사명일 것이다. 바로 자신의 죽음이 그렇다.


 

*  둘째에 대하여 - 죽음을 인식한 후의 삶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의 출발선 상에 놓여지게 되는데, 그 출발선의 종착점은 바로 죽음이다. 사실 우리는 죽음을 '탄생이라는 이름으로 선고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명백한 선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신기할 따름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죽음을 향해 가는 동안에 자신의 탄생을 기념할 수 있는 기회는 매년마다 있지만 자신의 죽음을 기념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타인의 죽음만을 겪으면서 죽음을 나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죽음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내 객관화 혹은 사물화 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자신은 절대로 자신의 사망소식을 들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삶을 대하는 태도는 바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주변이 아름다워지는 것, 여행의 끝나갈 무렵이 다가올수록 여행지가 더 그립고 아쉬워지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서 삶을 좀 더 가치 있게 채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채색한 후에 얻어지는 아름다움, 화가가 앞으로 자신이 그림을 그려나갈 캔버스를 눈 앞에 두듯, 자신의 존재는 현재의 삶을 그려나가기 위해 죽음을 인식해야 한다. 채색은 죽음에 대한 인식 후의 일이다.

 


 이처럼 탄생과 죽음은 서로에게 모순되어 있으나 삶 속에서 융합되게 되는데, 삶이라는 것은 탄생과 죽음의 모순이 만들어내는 변증법의 과정이다. 탄생이 가진 숭고함만큼이나 죽음역시 숭고하다는 것에 대한 이유는 이보다도 훨씬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나는 그 아는바가 적어 아직 두 가지 이유 밖에는 찾지 못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의 현명함으로 내게 몇 가지 더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삶이 더욱 값지게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숭고한 죽음이 더욱 숭고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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