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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다발

우리는 너무도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오선비 2018. 3. 30. 10:56




 그 어떤 곳을 둘러보아도 사물이 있다. 사물이 없는 곳은 도리어 찾기가 힘들다. 막상 지금 내 주변만 해도 컵, 책, 책상, 연필 등의 생산물이 있고, 조금 시야를 돌려 밖을 보면 구름, 해, 산 등의 자연물도 있다. 하지만 자연물은 인간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들 이므로 이 글에서 사물이라 하면 전자의 경우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생산물로써의 사물로 그 의미를 제한하기로 하고 글을 이어나간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어쩌면 인간은 사물과의 관계가 없이는 살아가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과도한 편리 추구로 인해 포화된 사물들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이 세상은 너무도 편리해졌다.  


 사물들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에서 그 가치들은 '돈'으로 환원되며 보통은 그 돈의 '액수'가 그 사물의 가치와 비례한다. 우리는 가격을 알기 때문에, 즉 그것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결국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편리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돈은 참으로 편리한 구석이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다면 그에 해당하는 가치의 정도 즉, 그 정도의 액수만 있으면 된다(고맙게도 '정가'라는 것이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해주고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곧 돈에 대한 욕망과도 일치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태는 돈을 추구하는 물신주의적 측면을 강하게 성장시키고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물론 그것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우리를 아주 조용히 잠식해왔다). 현대 속의 우리는 돈만 있으면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편리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것은 거대한 축복이다. 정말이지 거대한 축복이다. 이 거대한 축복을 이루는 세 가지의 핵심적인 키워드가 있다. 모든 것의 수치화와 객관화, 명사화, 존재가치의 변화가 그것이다.    

      



* 수치화, 객관화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로서 본래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직접 만들어 사용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필요'에 의해서 '내가 직접' 만들어 왔다. 하지만 현대는(물론 훨씬 이전의 자본주의의 태동기에서부터) 더 이상 만들어서 사용하지 않는다. 직접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판매를 목적으로 시장에 선보이기 위함이다. 어떤 물건을 보고, 소유하고픈 욕망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그것의 효용적인 가치를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금전적인 가치인 '정가'가 궁금해진다. 그것을 소유하고자 마음먹으면 그만큼의 돈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게 될 때 더 이상 "나의 삶이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인가?"를 먼저 묻는다. 만약 원시시대에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좋은 도구(칼 또는 활)를 보게 되면 그것의 효용성을 생각하여 가지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이 생겼었다(그것은 빼앗지 않는 이상 가지고 싶다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는 돈만 있으면 가질 수 있기에 얼마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은 점차 수치화된다. 무엇인가가 이렇게 수치화되면 그것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어 버린다. 측량할 수 없는 노력적인 면, 과정적인 면, 순수한 가치적인 면들까지 객관화하고 수치화시켜버린다. "나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얼마만큼의 돈을 가져왔는가?" 이 물음이 굉장히 중요해지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나의 노력이 금전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벌어들인 금전이 나의 노력의 양이 되는 것이다. 청소부가 청소를 하고 임금을 받는 것은 확실히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청소부가 아닌 사람이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은 금전적인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돈도 안 되는데..."라는 말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텐데, 이미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확실히 객관화, 수치화의 '세련된' 메커니즘이 '자리 잡혀진' 것이다(내가 볼 때 이것은 분명히 '자리 잡혀진' 것이다). 덕분에 모든 것들이 명확해졌으며 세련돼졌다. 예전처럼 골치 아프게 가치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할 부담을 이 시대가 덜어준 것이다.     


 이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가?       


   

* 명사화     


 끊임없이 쏟아지는 사물들, 그 많은 것들을 지칭하려면 새로운 '명사'역시 끊임없이 만들어져야 함은 당연하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로써, '전쟁사'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현대에 이를 수 있다. 그와 유사한 방법적인 측면 중 하나를 나는 새로 생겨나는 '명사'들에 대한 관찰 즉, 명사의 역사를 따라가도 현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끼와 활, 그리스도와 성서, 공장과 기계, 컴퓨터 몇 개 안 되는 이 명사들의 나열 속에는 인류의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가 들어있다(전쟁사에는 인간의 역동성이라도 느낄 수 있지만 명사들의 나열 속에는 고정된 이미지만이 대변되고 있다).      


 새로운 명사들의 급격한 생성에서 소유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이다. 새로운 것이 출현함에 있어 그에 맞는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부정할만한 측면은 아닐 것이나, 문제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던 인간적인 감정들마저 '명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명사화시킬 수 없는 것들마저 명사화시킬 만큼 신이 되어 버린 것인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정신과에 찾아온 환자는 이렇게 말한다. "의사 선생님 저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불면증은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불면증'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몇십 년 전만 해도 이렇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의사 선생님 저는 밤에 잠에 들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비일비재하다.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역시 몇십 년 전이라면, "나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표현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무의식 중에 자신과 관계된 상태나 상황마저도 나와 관계없는 '소유물'로 전락시킨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적인 측면은 철저하게 제거된다. 후자의 표현들은 '진행적'이고 '상태적'인 반면에 전자의 표현들은 '고정적'이고 '객관적'이다. 드디어 인간은 자신의 감정마저 한걸음 떨어져서 객관화시키고,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이나 상태에서 도피해버린다. '고정적', '객관적'으로 만들어 버린 우리의 감정들은 사물이 되어, 물건을 수리하듯이 전문가(아마도 의사)에게 수리를 요청한다. 이제 수리기간 동안만 전문가에게 맡기게 되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혹은 그렇게 믿는다). 더 이상 복잡하게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가?        


 

* 존재가치의 변화     


 그 사람의 복장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다. 먼지 묻은 편한 복장이라면 어딘가의 인부, 양복과 손에 든 가방을 보면 어느 회사의 사원 등등. 복장뿐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 특히 어떤 브랜드의 물건인가를 보면 경제적 지위까지도 알 수 있다. 값 비싼 시계나 값 비싼 자동차 등을 소유하고 있다면, 경제적으로도 부유하다고 생각되고, 안타깝게도 사회적 지위 역시 상응하기가 대부분이다. 소유물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은 사기꾼들이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임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자신의 존재를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 주변과 관계 맺는 양상들로부터 파악하기보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동일화하기를 원한다. 다소 진부한 말이겠지만, 이제는 인간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인간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보다 적게 소유한다면 나의 존재가치는 그 사람보다 떨어진다고 느끼기에 더 많이, 더 풍족하게 소유하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존재가치를 올리려는 행동은(실제로 올라가지도 않는다), 자신의 아래를 보면서 안도하기보다는(물론 이 역시 좋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위를 보면서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자신의 옆을 보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 한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삶의 안락함이 물질적 소유의 종착점인 허무함을 감추어주고 있다.  


 현대는 돈만 있으면 대부분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올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듯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소유에서 오는 만족감에서 존재가치를 잘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현대 사회는 돈만 있으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무엇인가의 진리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소유하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가?          




 존재의 가치는 이처럼 소유의 가치와 동등해진다. 그리고 그 방법 역시 너무도 간단하다. 돈만 있으면 된다. 그 어떤 시대에서 이처럼 자신의 존재가치를 올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던가? 우리는 실로 '편리의 시대'에 살고 있음이 확실하다.     


 편리함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마음속 깊이 응원하고 존경한다!     


 어찌 그토록 단편적인 것에서 삶의 진리를 찾을 수 있는가? 옛 성인들은 꽃이 피고 지는 것, 구름이 올라 비가 내리는 것 등의 단순한 사실들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우쳤다고 하던데, 지금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이 성인이었다. 성인들이 이리도 많으니 세상은 더욱 편리해질 것이 확실하다.  


 아아! 이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가? 너무도 편리한 시대이다! 



 그런데, 왜 눈물이 흐르지?



*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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